‘실리콘밸리 환상’이란 것이 있습니다.
마크 주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와 세계 최고 부자인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물론 지금도 광팬을 이끌고 있는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도 모두 20대 초반, 대학을 중퇴하고 회사를 창업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죠. ‘크게 성공을 하려면 대학을 끝까지 다닐 필요 없이 당장 회사를 차려야 한다’는 신화가 널리 확산됐습니다. 그런데 왜 이를 신화라고 할까요?
*실리콘밸리 역사상 최악의 스캔들?
이런 신화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한 여성이 있습니다. 그는 2003년 20살의 대학 중퇴해 회사를 설립했고 신화처럼 이 회사는 한때 90억달러(약 11조4,120억원)라는 천문학적인 가치로 평가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언론들은 이 여성을 ‘여자 스티브잡스’라고 불렀죠. 하지만 피 한방울로 250여가 지의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는 이 회사의 기술력은 모두 사기로 밝혀지고, 회사는 2018년 공식 폐업합니다.
바로 미국 바이오 스타트업 ‘테라노스’와 창립자 엘리자베스 홈즈의 이야기죠. 외신은 물론 국내에서도 자주 다뤘기 때문에 실리콘밸리 역사상 최악의 스캔들로 꼽히는 이 뉴스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졌는지 불편한 진실을 알고 계신가요?
*왕따 소녀가 억만장자가 되다?!
테라노스와 창립자 엘리자베스 홈즈의 화려한 성공과 몰락을 다룬 디즈니플러스의 오리지널 시리즈 ‘드롭아웃(The Dropout)’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총 8회로 구성된 이 작품은 홈즈의 고등학교 시절에서부터 몰락 이후 결과까지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인지 내용도 탄탄하고 사건전개도 매우 빨라 8회를 한 번에 정주행해야 할 정도였죠,
특히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홈즈 연기는 그야말로 압권입니다. 친구들의 따가운 눈총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달리기 완주하던 왕따 소녀에서부터 천문학적인 투자금을 유치하기 위해 목소리를 중저음 톤으로 바꾸는 연기까지 실제 홈즈를 빼다 박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잡스의 트레이드 마크인 검은 터틀렉을 입고 이미지 메이킹에 몰입하는 소시오패스 연기는 소름까지 끼치더라고요.
*실패가 죄는 아니지 않나?
왕따 소녀였던 홈즈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내 꿈은 억만장자가 되는 것”이라며 잡스의 사진 포스터를 방에 걸어둡니다. 스탠포드대 화학공학과 진학에 성공합니다. 그런데 ‘신입생답게 연애를 하고 술을 마시라’는 선배들과 교수들의 조언에도 박사과정들이 즐비한 연구 랩실에 들어가기 위해 애를 쓰고 마침내 이를 쟁취합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스스로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과정은 그야말로 패스한 거죠.
랩 생활도 적응될 때 쯤 홈즈는 주사바늘 공포증 때문에 피를 보면 기절하는 자신의 경험에서 주사기를 쓰지 않고 적은 양의 피로도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 방법을 직접 개발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이 아이디어로 스탠포드 의대 학과장을 설득해 고문으로 영입하고 부모님에게는 학교를 자퇴하고 대학 학자금을 투자해달라고 요구하죠.
그런데 홈즈는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보다는 주변사람들을 설득하고 마음을 사로잡는데 주력합니다. 인맥을 철저하게 이용해 겨우 20살에 테라노스를 설립하죠. 이후에도 획기적인 아이디어(아직 현실화되지 않은)와 아름다운 금발 외모의 어린 여성 천재라는 이미지를 앞세워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 등을 줄줄이 이사회에 영입합니다. 이들은 철석 같이 홈즈의 기술과 테라노스의 미래를 믿었습니다.
문제는 그 어느 누구도 피 한방울로 250여가지의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는 기술력을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성공했다는 홈즈의 말만 믿었던 것이죠. 홈즈도 할 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실험실이라는 제한된 조건에서 단 차례는 성공했거든요. 실험 결과를 재현하는 데는 매번 실패했지만 돈만 모으면 언젠가는 성공할 것이라고 스스로 믿어버립니다. “실패가 죄는 아니지 않나”, “많은 스타트업들이 실패한다”며 자신의 거짓말을 정당화해나가죠. 급기야 ‘황우석 사태’처럼 결과까지 조작합니다.
이런 조작을 직원들이 가만 있었을까요? 홈즈에게 항의하는 직원은 바로 내보냅니다. 또 직원들에게 ‘비밀유지 의무’를 강요하면서 감시까지 하죠. 그래도 비밀을 폭로하려는 직원에게는 패가망신 수준의 소송전을 펼치고요.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죠.
결국 홈즈는 10개의 죄목을 기소됩니다. 최근 외신을 보니 135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는군요. 그런데도 홈즈는 사기가 아닌 ‘사업 실패’라고 여전히 주장했다고 합니다.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한 것이죠.
*‘드롭아웃’의 참 뜻은?
그런데 홈즈는 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까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제목에 담긴 듯합니다. 제목 ‘드롭아웃’은 중퇴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의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 위해 따분한 학교공부를 견디고 수없이 많은 연구와 실패를 거듭하는 과학자들의 노력을 모두 건너뛰고 성공에만 매달리는 실리콘밸리 성공 신화의 어두운 단면을 뜻하죠. 알맹이가 없어도 홍보와 인맥을 동원한 거짓말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잘못된 신화. 여기에 서로 믿어야 할 동료와 직원들을 도구처럼 여기고 필요 없어지면 매몰차게 내쳐야 한다는 진정한 CEO라는 그릇된 신드롬까지 포함합니다.
이런 드롭아웃 신드롬에 빠진 홈즈는 창립 동료를 자살하게 만드는 소피오패스적인 성향까지 보이죠. 그래서 홈즈의 몰락은 실리콘밸리의 여성 창업자들의 이미지를 추락시키고 수 십년 퇴보시켰습니다.
그런데 홈즈에게도 멈출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사업 초반 스탠퍼드 의대 교수 필리스 가드너를 만나 조언을 청했을 때인데요. 사업계획서를 본 가드너는 이렇게 충고합니다.
“단계를 건너뛰면 안 돼요. 노력을 해야죠. 학생의 노력, 다른 사람의 노력 아주 많은 노력이 필요해요. 누구의 도움 없이 직접 했다는 걸 인정받을 만큼요. 그리고 과학은 끝없이 해보는 거예요. 정말로 뭐라도 할 수 있으려면 더는 불가능할 것 같을 만큼 아주 오랫동안 해봤어야만 해요. 과학은 현실이지 공상이 아니어요.”
하지만 이런 충고를 듣고도 홈즈는 멈추지 않습니다. “세상은 특정 방식으로 돌아가다가 위대한 아이디어가 나타나면 모든 것이 바뀌어요”라며 잘못된 욕망을 더욱 드러냈죠.
이때 홈즈가 잠시 사업을 멈추고 학교로 돌아갔다면 어땠을까요? 투자이익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홈즈의 미래를 조금이라도 걱정하는 어른들이 홈즈의 지나친 욕심을 따끔하게 혼냈다면 달라지지 않을까하는 아쉬움이 너무나 진하게 남습니다.
이런 면에서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단계를 하나하나 꾹꾹 눌러 밟으면 모든 것을 증명해가는 바이오에프디엔씨와 같은 업체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앞으로는 허상을 쫓는 ‘실리콘밸리 신화’보다는 차근차근 현실을 증명해가는 ‘송도 신화’가 더 빛나지 않을까요?